본문 바로가기
라이프/자서전

28년전 1993년 12월 하남시 미사리에 있는 화훼농장 근무 이야기

by 농수도 2021. 10. 1.
반응형

1993년 12월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에 있는 한 농원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학교 컴퓨터교실을 운영하고 있어서 취업의 전선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사회 경험이 부족한 나에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취업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친구 성춘, 대순이랑 3명이 함께 가는 길이였고 그때 서울 방문은 거의 처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때 엄마의 손을 잡고 고모내집에 갈 때 빼고는 한 번도 와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서울에 있는 각종 건물들과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는 매우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또한 그동안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는 있어지만 그것은 아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내려서 2호선 지하철을 타게 되었는데 타는 방법을 몰라서 지난번에 왔다간 성춘이라는 친구가 하는 것을 따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너무 두리번거리면 너무 촌티가 날 것 만 같아서 가능하면 땅만 보고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지인 하남시 미사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은 조정경기장이 보이는 곳에 위치하였으며 수많은 하우스가 보여 도시라기보다는 그냥 시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착하여 무엇을 할까 하다가  저녁에 풍산이라는 동네에서 통닭집에 들어가 치킨 한 마리 시켜서 먹었는데 그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네요. 

해당사진은 해당 글과 관계가 없으며 자료 사진입니다. 

농장에 도착해서 어떤 일을 할까 고민을 하였는데 성춘이와 대순이는  다른 집에서 화훼 일을 하였고  나는 혼자서 스킨을 재배하는 하우스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처음으로 농막이라는 곳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시골에서 문틈을 들어오는 바람을 모두 받아들이고 방에 있는 물이 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나는 이곳 농막 생활이 매우 쾌적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농막이란 조립식으로 집을 짓고 그곳에 하우스를 덮어서 외부에서 볼 때는 건물이 보이지 않고 하우스만 보이게 해 놓은 곳으로 그곳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하였습니다.

다만 하우스 안이라 습기가 많고 또한 한 겨울에도 파리가 많아 그 파리를 잡기 위해 천정에 수많은 끈끈이가 붙어 있었던 것이 매우 인상적이였습니다.

해당사진은 해당 글과 관계가 없으며 자료 사진입니다. 

그곳의 농장이름은  "무릉농원"이라는 곳이었고 나는 관엽식물인 스킨과, 벤자민을 재배하였습니다. 비교적 작은 시설로 운영하는 곳이었지만 스킨은 35℃의 고온 식물이기 때문에 연료비가 많이 들어가 할 수 없이 연탄난로를 10개 정도 설치를 하였습니다. 또한  하우스 내에 엉켜있는 전선을 보고  합선이 우려되어 그동안 시골에서 살면서 전기에 대한 기본지식을 알고 있어던 나는 하우스내에 설치한 전선을 모두 수리하고 전등 또한 합선의 위험이 없도록 다시 설치하여 야간에도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더니 일에 대한 탄력성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농장주는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었는지 몰라도 나에게 하우스 2동을 맡기고 해외로 가족여행을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 스킨을 재배하는 것이다 보니  매일 꽃이접을 하여 300개 정도의 화분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스킨 가격은 화분을 포함하여 큰 것은 1,500원이었고 작은 것은 800원이었는데 하루에 80만원정도를 직접 판매할 때도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화훼농업이 어렵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해당사진은 해당 글과 관계가 없으며 자료 사진입니다. 


그곳에서 원예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것이 사실이였습니다.
온도와 습도 그리고 빛에 따른 식물의 자라는 형태를 살펴볼 수 있었죠
또한 꽃이 접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이론에 대한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 하우스는 3중 필름으로 되어 있는데 그 필름 속에 솜이 들어 가 있어 보온성은 뛰어났지만 빛의 투과량은 비교적 적은 편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엽식물이 재배하기에는 적당한 것이였습니다. 일반 PE필름을 사용하면 내구성이 떨어져 매년 피복을 바꾸어야 하는 단점이 있으며 유리온실은 초기 투자비용이 많기 때문에 하우스 하나 설치할 때에도 정확한 경영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그곳에서 연탄으로만 재배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온풍기가 있었는데 온풍기는 사실 정전이 되거나 또는 연료가 떨어지게 되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에 연탄난로는 필수였습니다. 물론 연탄난로가 식물에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연탄을 태우면서 나오는 일산화탄소는 문제가 되지만 이산화탄소는 식물에게 이롭게 만들기 때문이죠. 다만 단점은 하우스는 일정 습도가 유지가 되어야 하는데 연탄난로로 인하여 건조가 발생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스프링클러 또는 점적관수를 설치를 하였으며  또한 환기가 필요해서 낮에 외기 온도가 높을 때 환기를 시켜 일산화탄소에 대한 피해를 줄여 나갔습니다.

 

 해당사진은 해당 글과 관계가 없으며 자료 사진입니다. 

연탄 난로의 필요성은 밤에 가장 큰 효과를 보았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밤에 전기가 나갈 경우 온풍기에서 일정 시간 경보음이 울리지만 그 장치가 잠을 자는 농막까지 연결되어 있어야만 알 수 있으며 또한 정전되어 난방에 문제가 되면 그 피해는 금전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문제를 만들기 때문에  항상 비상대책이 농가에 필요하였습니다.
그 어떤 일을 할 때 만약이라는 가정을 항상 두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료를 줄 때 비료에 의한 피해가 발생하게 되면 해결방법, 농약을 남용하였을 때, 또는 중독되었을 때 등을 미리 알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곳 생활은 급여는 적었지만 관엽식물에 대한 기초지식을 알게 되었고 농장주도  급여도 올려 줄 테니 계속 남아서 일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지만 난 공부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정중하게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농업에 대한 지식이 그때만 해도 너무 부족하여 좀 더 배워 한국 최고의 농업인이 되겠다는 자부심을 갖기 위해 학교 다닐 때부터  천안에 있는 연암대학교에  입학을 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죠.

 

무릉농원에서 배운 것 중 가장 큰 것은 식물에 대한 관심이였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물의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동화 시설이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하우스 내에 사각지역이 있기 때문에 하우스의 입구와 끝부분 그리고 주변의 작물은 잘 자라지 않았고 또한 하우스의 바닥과 천정또한 온도차가 있기때문에 균일하게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도에 대한 지식과 하우스의 시설이 보충이 되고 관심까지 곁들인다면 우리나라 농업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다고 자부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