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자서전

가나안 농군학교 420기 수료를 하면서

by 농수도 2022. 12. 6.
반응형

2012-06-14 10:59:00

2012년 6월 11일 우리는 2박3일이라는 짧다면 짧은 교육을 받게 되었다.
장소는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연봉전길5 에 위치한  가나안농군학교이다.
사실 하남시에 있는 가아안 농군학교에 갈려고 하였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장소를 변경하였다.
이미 난 1994년에 가나안농군학교 선생님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하는지는 미리 알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가기 전부터 설래임도 있었지만 두려움도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생활은 매우 아끼고 절약을 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이 군대처럼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도착하자 마자 내 생각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껴쓰는 것은 맞지만 무조건 아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자는 것이였다.

오후 1시 15분에 도착하여 인원점검을 한다음 호실을 배정 받았다. 숙소입구에는 실내화가 보였는데 실내화는 실내화 앞부분이 앞으로 향하게 하고 신발은 뒷면이 보이게 정리하라고 한다. 실내화는 호실별로 찾기 편하도록 호실당 6켤래씩 정리되어 있었다. 뭐 이런 것이 중요할 까 생각도 했지만 정리를 하고 보니 벌써 "내 자신이 변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복도에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소화기가 일정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 안전에도 크게 신경쓴것 같다. 
이번에 우리는 총 19명이라는 적은 인원이 입소를 하여 호실이 남아 여자는 3층 남자는 2층을 사용하게 되었다.
호실에 도착하니 선풍기, 옷장, 이불장, 건조대가 있었다. 방은 총 6명이 잠을 잘 수 있도록 시설이 되어 있었으나 우리는 3명이 배정받았다.

우리는 방에 도착하여 우선 가져온 물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옷장을 여러 세면도구는 아래에 정리하고 옷을 윗부분에 정리하고 나니 시간이 금방 흘러 갔다. 2시부터 입교식이 있다는 안내방송이 나와 입교장으로 향했다. 사실 이날 정상적인 입교식을 할 강당이 내부 공사가 있어서 외국인이 사용하고 있는 가나안 세계지 도자 교육원 강당을 임시로 사용하게 되었다.
입소식 과정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싶었으나 핸드폰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였다. 다만 우리가 성인이고 직장인이라 수업시간에만 핸드폰을 별도 진열장에 보관하고 들어가 수업을 받았다. 이때문에 수업과 관련된 사진은 한장도 없다.
핸드폰 없이 수업을 받다 보니 교육에 열중 할 수 있었고 딴 생각을 할 수 도 없었다. 수업도중 핸드폰이 울리지 않고 또한 아예 전원을 꺼놓다 보니 교육에만 열중 할 수 있어서 매우 좋게 느껴졌다
이렇게 핸드폰 보관함을 만들고 사용한 것은  우리 기수가 처음이라고 하였다.

입교식에 앞서 가나안 농군학교에 대한 교육안내를 설명 받았다.
학교에서 인사법은 '개척'이라는 구호를 사용하는데 바른손을 왼쪽 가슴에 댄다. 이어서 점호, 구보, 청소, 절약, 식탁순서등을 배웠다.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 할사항을 강조했다.

첫째는 학교의 허락없이 강의실이나 지정된 구역을 떠난자, 둘째는 술을 마신 자, 마지막으로 본교의 교육과정을 따르지 않는 자. 이 부분을 어길경우 퇴소를 시킨다고 하니 술이나 간식을 소지하고 입교할 생각이 있다면 아예 입소를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번 교육에도 4명이 규칙을 어겨 중간에 퇴소하는 안타까움이 발생했다.  입교식은 비교적 조용하게 실시하였으며 묵념, 애국가제창, 원장선생님 인사, 선서순으로 진행되었다.

입교식을 마치고  장영수 선생님이 학교 설명을 들으면서 이동하였다. 학교는 약 15만평규모였으나 우천관계로 일부만 살펴 보게 되었다. 이중 가장 흥미로왔던 것은 학교 설립자인 일가 선생님의 집이다.  외부에서 볼때는 커 보였으나 사실 13평의 작은 공간이었으며 또한 자연이 훼손되는 이유 중 하나가 나무를 땔깜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보고 아궁이를 아예 만들지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굴뚝도 볼 수가 없었다. 
또한 마당에는 많은 돌등이 있었는데 무심코 지나갈 수 있었지만. 이곳 돌은 모두 세워져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 생명 없는 돌이지만 누워있지 말라" 그리고 돌 위에 돌을 얹어 놓은 것은 '서 있지만 말고 일을 하라' 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다시 한번 살펴보니 사실이었다. 모든 돌이 세워져 있고 일부 돌 위에는 돌이 또 올라가 있었다.

주변에는 작은 집들이 보였는데 이 집들은 기도원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기도원이 16개가 있는데 2층구조로 총 32명이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교육생이나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리 신청하면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하니 나도 이 기도원에서 몇일동안 내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렇게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고구마 저장고가 눈에 보였다. 이곳은 농군학교가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생활기반이 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고구마는 농군학교 개척의 상징 식품이라고 전했다. 또한 경기도 봉안에서 개척할 당시는 일제 시대이기 때문에 쌀을 공출하였는데 일가 김용기 장로는 쌀 농사 폐지를 선언하고 대체 식량을 찾다가 여러가지 요리에 사용할 수 있는 고구마를 선택하게 된 것이였다. 하지만 고구마는 1년동안 저장이 당시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약 7년동안 500여 가마니의 고구마를 썩혀 가면서 적정온도를 유지하는 저장고를 고안해냈다. 결국 이 고구마 저장고는 개척정신, 애국정신, 항일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학교 견학을 마치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아무생각없이 밥을 먹고 또한 먹고 나서 남는 음식은 그냥 음식쓰레기통으로 가는 것이 생활이였다. 또한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각종 간식거리도 이곳에서는 이용 할 수 없다. 즉 식사를 제외한 모든 것을 먹을 수 없도록 해 놨다. 우리는 직장인이고 성년이라 하루에 녹차 한잔은 별도로 허용을 시켰으나 그 외에는 커피, 과자류등 간식은 먹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밥을 남기면 벌칙이 있다고 해서 먹을 만큼만 담았는데 평소에 먹는것보다는 적게 담을 수 밖에 없었다. 식사전에 하는 것이 있다.

첫째는 감사의 기도이다. 쌀을 생산하기 위해 88번의 농민들의 손길이 간다고 한다. 그들과 자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위함이다. 둘째는 구호이다. 구호는 식당 입구에 크게 표시되어 있다. '먹기 위하여 먹지 말고 일하기 위하여 먹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자', '음식 한끼에 반드시 4시간씩 일하고 먹자' 라는 구호를 하고 나서 함께 식사를 시작한다.
밥을 먹을때는 함께 시작해서 모두 먹을때까지 함께 한다. 그리고 모두들 밥 한톨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비웠다. 잔반통에 잔반이 하나도 생기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잔반이 없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이익이 발생할까 생각 해 봤다. 1년에 우리나라에서 버리는 잔반량이 410만톤이 된다고 한다. 돈으로 따질경우 15조원이 된다고 한다. 만약 이것을 줄인다면 얼마나 많은 수익이 발생 할까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10%정도만 줄여도 1조가 넘는 금액이 절약된다고 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다. 교육 과정에서 소말리아에서는  매일 2,000명씩 굶어서 죽고 전 세계적으로 매일 25,000명이 굶어 죽는다고 한다. 어떤 곳은 하루에 한끼 먹는 것을 걱정하면서 살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음식물을 남기는 것이 죄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 아니 죄라고 본다.
저녁을 마치고 생활관 생활이 시작되었다. 생활관에서 생활은 절약이 기본이다. 물은 세면기의 70%만 사용하고 수독 꼭지는 반드시 잠그고 사용하며 물이 부족하면 다시 받아서 사용한다. 물을 틀어 놓고 사용하는 것보다 6~10배 절약이 된다고 한다.  또한 화장지는 6~8칸을 사용하면 적당하다고 한다. 저녁 점호는 9시 30분에 실시하는데 점호를 실시하기전 호실별로 정한 청소구역을 청소를 실시한다. 그리고 생활반 정리정돈을 하고 실시하는데 주로 인원점검, 정리정돈 상태, 건강상태를 파악한다.  10시에 취침을 하는데 그 이후로는 모두 소등해야 하면 개인 핸드폰 사용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물론 간식도 절대로 먹을 수 없다. 

새벽 5시에 종이 울린다. 이종이 울리면 5시 15분까지 운동장에 모인다. 운동장에 모여 함성과 그리고 구호를 외친다. 애국가는 4절까지 불렀는데 이렇게 불러 본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또한 비가올때를 제외하고는 구보를 실시한다고 하였다. 예전에는 4km정도 구보를 하기도 하였는데 우리는 운동장 4바퀴정도 도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구보를 하는 이유는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죽은 시체, 죽은사람은 뛸 수 없고 살아 있는 사람만이 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몸만 뛰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사상도 함께 뛰는 것이며 뛰는 나라와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첫 식사때는 어리둥절 하였는데 2일째 식당에 들어가니 구호도 보이고 메뉴도 보이고 원산지도 보이기 시작했다. 음식맛은 매우 좋았다. 함께 먹고 함께 일어나야 하기때문에 평상시보다는 빠르게 먹었지만 입맛에 딱 맞았다.
교육중점은 올바른 인생관 및 정체성 확립, 자기극복을 통한 개척정신의 생활화, 효 사상을 바탕으로 한 건전한 가정윤리 확립, 건전한 소비문화 조성을 위한 근검절약의 생활화, 함께 사는 시민의식 및 공동체의식 함양, 건전한 근로관 및 직업관 확립, 올바른 국가관 확립 이며 교훈은 알도록 배우자, 몸바쳐 일하자, 겸손히 섬기자이다.

오늘은 나머지 인생에 첫날이다. 땀을 많이 흘리면 눈물을 적게 흘린다. 버는재주 없으면 쓰는 재주도 없어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법에 저촉되는 일은 절대 하지 말고, 실수를 하지 말고, 남에게 빚을 지지 말고, 하지 말아야 할 도박등을 하지 말것이며 자신의 길을 가라고 하였다.
김태은 선생님은 우리들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으며 중요한것과 긴급한것중 무엇을 먼저 할것인가에 대한 설명을 하였으며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갖고 모두 함께 토론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마지막날에는 자신의 기질을 스스로 평가를 하고 또한 주변에서 보는 나의 기질을 비교분석하면서 결과에 따라 자신의 행동의 방향을 잡아 주기도 하였다.
128트레이를 사용하였는데 종자 하나씩만 넣으라고 한다. 이유는 하나 이상 넣어 발아가 되면 결국 그중 하나는 버려야 하므로 씨앗을 아끼기 위해서 반드시 한알씩만 넣으라고 한다.오후에는 농장 실습이 있었는데 비가 오다 멈추다를 계속하여 하우스및 창고에서 씨앗 파종을 실시하였다. 기계를 이용하여 쉽게 할수도 있지만 이날 파종한 양배추 씨앗은 피복이 되어 있지 않아 기계를 이용시 씨앗크기가 일정치 않는 관계로 구멍이 막혀 시간이 더 지체될 수 있다고 하면서 손수 파종을 실시하였다.

파종에 앞서 잠시 유기농업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는데 이곳 마을이 2번째로 소득이 좋다고 한다. 풀무원과 청정원에서 대부분 매입하기 때문에 걱정없이 재배를 한다고 한다. 주로 재배하는 것은 신선초라고 전했다.
또한 귀농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는데 아무생각없이 귀농할 생각이라면 포기하라고 도 말했다. 귀농을 할려면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토지를 임대를 할 것인지 아니면 매입을 할것인지 결정을 해야 하며 하우스 설립비용도 감안해야 한다고 한다. 면적은 작목에 따라 틀리지만 1년 3,000만원정도 수익을 감안해서 면적을 결정하면 되는데 시설하우스는 평균 3,000평 이상이 적당하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유기농산물을 하기때문에 병충해를 방지하기 위해 끊이 없이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제충국을 이용한 살충법은 매우 흥미롭게 들렸다.

퇴소식 전에는 이해극 전국유기농협회 회장으로 부터 강의가 있었다. 이분은 내가 본 농민중 최고 중에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952년에 태어나 35년간 농업에만 관심을 갖고 그동안 인생을 살아 왔다. 하우스 자동개폐기를 만들기도 하였고 고추를 촉성재배 하여 당시 직장인 1년 연봉보다 더 돈을 벌기도 하였다고 전했다. 또한 강의내용중 창의력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유기농업의 필요성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나 또한 유기농업에 대한 교육을 3년이상 받은 경험이 있어서 그분 한마디 한마디가 공감이 되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농업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화 도중에 "풍선은 계속 부풀면 터진다" 그렇기 때문에 돈도 욕심이 생겨 무리하면 결국 모든것을 망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겨자, 고춧가루 등을 이용한 천연색소로 오색 가래떡을 시판하여 성공을 했으며 다음에 다시 태어나도 농업에 종사하겠다고 하였다.
북한에서 600일 동안 있으면서 북한사람들의 이야기도 전했다. 북한사람들은 시키는 일은 매우 잘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라고 전했다. 스스로 개척하고 창조해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한중FTA에 대한 걱정도 전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이미 계획이 잡혀 있는 모습을 보고 한국 농업 미래가 결코 어둡지 않다는 것을 충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본 글내용중 잘못된 사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들은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치명적인 오류가 있으면 댓글 또는 문자 019-252-6006으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