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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맛집/향토유적&문화제

처인성

by 농수도 2021.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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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념물 제44호

용인시는 처인구, 기흥구, 수지구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처인구의 명칭은 처인성 전투에 기반하여 생겼다고 하는데요. 처인성 전투가 있었던 장소에 한번 가보았습니다. 

입구에는 처인성 역사교육관이 자리 잡고 있는데요. 아직 오픈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인성은 고려 고종 19년(1232) 고려군과 몽골군이 전투를 벌여 승리한 유적지라고 합니다. 이 해 1월 제1차 고려. 몽골 전쟁의 강화 교섭이 성립되어 몽골군이 후퇴한 이후 몽골은 고려에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려의 최고 집권자였던 최우는 강화도에 천도하여 몽골의 침략에 끝까지 항전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6월 17일 강화천도를 단행하고 고려에 파견되었던 몽골의 다루가치 및 군인들을 살해하거나 국경 밖으로 축출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몽골은 그해 8월 다시 살리타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고려 침공을 재개하였습니다. 10월 안북성에 군사를 주둔시킨 살리타는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고 자신의 제4군을 이끌고 개경을 지나 임진강을 건나 한양성을 함락시키고 11월 중순에는 광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그 주력을 용인으로 전진시켰습니다. 

살리타는 제4군의 주력을 강화도 맞은 편 통진으로 진출시켜 강화도를 압박하는 한편, 자신을 일부 병력을 거느리고 처인성으로 남진하였습니다. 처인성은 당시 수원에 속한 곳으로써 양인보다 천대받던 신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둘레 약 400m의 작은 토성으로 이때 처인성에서는 용인을 비롯한 인근 고을에서 피난 온 군민과 승장 김윤후를 비롯한 승병들이 방어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12월 16일 몽골군은  살리타의 지휘 하에 처인성을 공격하였으나, 처인성 동문 밖 언덕에 매복하여 있던 고려군은 몽골군을 기습하여 살리타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고려군은 이때를 틈타 공격을 가하여 지휘관을 잃어 전열을 걷잡을 수 없이 와홰된 몽골군을 대파하였다고 합니다. 

처인성 전투는 몽굴과의 전쟁이 발발한 이래 고려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였습니다. 전쟁 발발 이래 시종일관 패세를 면치 못하였던 고려는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처인성을 돌아 보았는데요. 성이라고 하여 돌로 성곽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런 모습은 아니고 그냥 언덕으로 보입니다.  오른쪽으로 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 올라가 보았는데요. 비교적 평지로 되어 있답니다. 처인성 전체를 돌아보는 시간은 20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규모는 작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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